제1부
베베르라는 사람
1.1 발트 독일인 외교관의 조선 부임
베베르는 1841년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에스토니아의 독일계 루터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발트 독일인은 러시아 제국 외교·관료·군 엘리트 가운데 특수한 지위를 차지했던 집단으로, 러시아어와 독일어를 모두 구사하고 서구와 러시아의 중개자 역할을 맡았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한 동양학자로 출발해 1865년 외교에 입문, 톈진·베이징에서 근무했다. 1876년에는 톈진에서 덴마크·독일 부영사직을 겸임한 바도 있다.
1884년 봄 그는 조러수호통상조약(1884-07-07) 교섭 전 사전 답사로 서울에 다녀갔다. 같은 해 7월 7일 외무독판 김병시(金炳始)와 베베르 사이에서 조약이 본조인되었고, 1885년 그는 초대 대리공사로 정식 부임했다. 이임은 1897년 9월. 정식 후임 스페이예르(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Шпейер) 도착 후의 일이다.
1.2 12년이 글에 부여한 두께
당시 극동 외교관이 한 도시에 10년 이상 체류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이 12년이 그의 글에 장기 관찰자의 두께를 부여한다. 그는 한 사건의 단편이 아니라 연쇄를 보았고, 같은 인물(고종, 명성황후, 대원군, 박정양, 김홍집)을 시간 축 위에서 추적할 수 있었다. 그가 1895년 10월 25일 조선 외부대신을 다시 찾아가며 던진 한 마디 — “한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왔고, 근접거리에서 한국의 운명과 함께해 온 저는 …” — 는 외교 공문에서 드문 1인칭 자기서술이다. 그는 조선을 외교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경력·생애와 깊이 얽힌 장소로 인식했다.
1.3 사적 기록의 파괴와 공적 기록의 무게
가족 자료는 극도로 제한적이다. weber-017·weber-021에서 확인되듯 그의 사적 서한 대부분은 1930~40년대 나치 치하 독일에서 그의 유족이 보복을 두려워하여 파기했다. 손녀 Ebba Nietfeld-von Waeber(1937–2021)가 2015년 실비아 브레젤(Sylvia Bräsel)에게 가족 자료 접근을 허용해 2021년 사진집이 출판되었으나, 그것은 회화적 인상의 모음이지 문헌학적 편찬이 아니다.
따라서 한국 독자가 베베르의 내면에 다가갈 통로는 거의 전적으로 그가 외교관으로서 본국에 보낸 공식·비밀 전문, 그리고 1903년의 〈조선에 관한 각서〉(weber-004)뿐이다. 이는 제약이지만 동시에 보존이기도 하다. 사적 회고의 자기 미화 가능성이 차단된 채 그가 사건의 와중에 쓴 공문들이 거의 그대로 남았다는 것 — 이것이 본 보고서가 그 공문 자체를 본문 골격으로 삼는 이유다.